한국 사회-운동의 문화정치적 쇄신을 위하여(2)

노동운동-시민운동 절합, 새로운 사회운동의 패러다임을

3. 사회운동 내 선순환 연결망의 구성 전망

위의 논의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고진의 논의 중에서 다음과 같은 원리들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1) 비자본주의적 생산-협동조합이 작동하기 위한 경제적인 기초는 제로섬 화폐라고 할 LETS 금융시스템이다.
2) 비자본주의적 생산-협동조합은 구성원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참여(탈퇴도 가능한)가 가능한 자발성과 호혜적 윤리에 기초해야 한다.
3) 이 생산-협동조합이 자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주식회사로 전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역적, 전국적, 국제적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으로 확대 발전해 나가야 한다.
4) <자본-네이션-국가>의 삼각동맹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중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 중심이 고정적으로 권력화 되지 않도록 <선거+추첨>과 같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채택해야 한다.

이런 전제 하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현재 한국의 진보적-개혁적 사회운동들 내에서 연대의 새로운 방식과 운동의 내용을 토론하고, 문제점과 대안을 상호공유하는 방식으로 점층적으로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을 구성, 확대 발전시켜가는 방안을 제안해 보겠다.

첫째, 진보와 개혁을 추구해온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들 간의 새로운 형태의 긴밀하고도 적극인 연대가 구성되어야 한다. 이 연대를 통해 각 사회운동세력들은 국내외 상황의 흐름에 관한 중장기적인 정세판단을 공유하면서 나열식으로 각개약진해온 기존의 운동방식을 점검하고, 각 운동영역들 간의 '선순환 연결망'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흩어져 있거나 대립되어 있던 운동들 간에 '선순환 연결망'을 먼저 만들어 가면서 위의 전제들을 한국사회의 현실에 맞게 적절하게 실현하거나 수정 보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선순환 연결망(positive feedback loop)’이라는 발상은 생태학적 사고로부터 발전하여 최근에는 복잡한 사회 시스템의 발전적 운영에 적용되고 있는 <시스템 다이나믹스> 이론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1)

이에 따르면 사회 시스템은 복잡한 요소와 층위들이 중층결정된 동태적 과정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각 요소와 층위들은 순환적 인과관계를 이루면서 피드백 루프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이때 선순환 연결이 될 수도 악순환 연결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작동상태에서는 어떤 한 두 요인에 상대적 중심성이 고정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에 숲을 보고 나무를 보는 식의 왕복 운동이 중시될 수밖에 없다. 즉 시스템적 사고란 동태적 사고, 사실적 사고, 피드백 관계를 중시하는 사고이다. 이와 같은 시스템 다이나믹스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는 시간 속에서 요소들 간의 중층적인 피드백 관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지 특정 형태나 구조로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피드백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거나 피드백 고리가 끊길 경우 전체 시스템이 오작동하거나 심지어 붕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한국의 사회운동은 각 단위 운동영역들 간에 긍정적 피드백이 작동하지 못함은 물론 피드백 고리가 끊겨 있고, 각 단위 운동영역 내에서의 하위 요소들 사이에서도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서 급속하게 전체 운동의 한계와 붕괴 위기가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주요 운동들 사이에, 각 단위운동 내에서도 긍정적 피드백 루프가 연결되어 선순환 연결망이 이루어진다면 운동의 회생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런 복합적 선순환 연결망을 만들어내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가능할 경우 노동운동의 강화가 여성운동의 강화에, 여성운동의 강화가 환경운동의 강화에, 환경운동의 강화가 농민운동의 강화에, 농민운동의 강화가 문화운동의 강화에, 문화운동의 강화가 교육운동의 강화에 기여하게 되는 방식으로 창조적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성명서에 이름 걸고 시기별-사안별로 나열식 연대라는 식의 느슨한 연대로는 현재와 미래의 총체적 위기에 대응하기 어렵고, 운동 자체의 붕괴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2002년부터 시작된 <한국사회포럼>은 그나마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모여 한국 사회와 운동의 전체 지형과 중심 쟁점을 점검하면서 연대 가능성을 탐색해 온 자리였다. 그러나 1년에 2박 3일 정도, 분과별로 세미나를 개최하는 느슨한 방식으로는 전체 사회와 운동이라는 커다랗고 복잡한 숲의 역동적 피드백 관계를 규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그간 <한국사회포럼>은 단지 각 나무들이 처한 어려움을 나열식으로 호소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1년 내내 대표, 집행위원, 활동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수준에 걸쳐 주 단위로 정세분석과 대안 마련을 위한 토론이 상설화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때 토론에 임하는 각 단위들이 전제해야 할 것은 동태적이고 복합적인 피드백 루프라는 관점으로 자신과 운동 전체의 문제점을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긴밀한 논의를 통해 87년 민주화 체제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한 정세판단의 공유와 사회운동 패러다임의 전면적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공유가 시급하다.

둘째, 진보적, 개혁적 사회운동의 목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지난 세기의 구분에 따르면 진보세력이 자본주의 자체의 변혁, 비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꿈꾸어 왔다면, 개혁세력은 자본주의 틀 내에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민주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하여 보다 나은 사회로의 발전을 이끌어내려 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진보든 개혁이든, 또 각각의 정파와 영역의 차이를 넘어서서 지난 세기와 현재 우리 사회의 사회운동은 사회의 전체 또는 하위 시스템의 변혁 또는 개혁만을 추구했지 그 시스템 변화가 각 개인과 크고 작은 공동체의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 전체 시스템의 양적 성장이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미치는 질적 변화 사이의 상호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 붕괴하고 만 "역사적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개혁 세력이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운동세력 중 진보세력은 93년 이후 사실상 해체-분산되었고, 사회운동의 주력은 어느 영역이든 개혁으로 성격을 한정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87년 민주화 체제를 통해 한국사회가 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군부-관료가 주도하는 재벌체제에서 군부가 제거되고 재벌이 주도하는 재벌-관료연합으로 변했을 뿐 정치적 민주화는 단지 현존하는 법적 테두리 내에서의 절차적 민주화라는 것으로 제한됨으로써 재벌-관료연합의 전횡을 통제할 국가적 규제조차 무력화되어 사회적 양극화와 위험사회화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개혁의 성과가 이 정도에 불과하니 차라리 군부독재, 개발독재 시대가 더 나았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진보와 개혁 둘 다가 무의미한 것일까?

단연코 그렇지 않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진보와 개혁의 내용과 그 차이와 공통점을 새롭게 규명하여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우선 진보의 목표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차별 없고 평등한 사회시스템을 만든다는 목표가 소유 대신 분배, 개발 대신 보존이라는 문제틀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100% '상품의존적인 상태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위로부터의 계획경제에 의해 생산과 소비를 양적으로 분배하는 방식 모두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립적이고 자존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 100% 시장중심사회나 100% 계획경제사회의 결말은 생활세계의 철저한 식민화로 귀결되고 말 뿐이다.

결국 진보의 목표는 부분적인 시장과 부분적인 계획을 활용하면서 종국적으로는 그동안 식민화 되어 온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자립적이고 자치적이며 호혜적이고 생태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재조율 되어야 한다. 개인과 공동체가 이런 자립적-자치적-호혜적-생태적 삶을 꾸릴 수 있는 능력(생태문화적 역능)은 정치민주화나 경제민주화만으로는 결코 획득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이런 능력들을 회복하고 확대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 진보적 생태문화운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의 개혁운동은 양적 평등이 확산되면 그런 능력이 회복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당장은 사회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에 몰두하여 각자의 삶이 점점 더 상품의존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대다수의 대중이 자립과 자존의 역량을 상실해가고 있는 현실의 심각한 위험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시스템이 개혁되어도 각 개인의 삶의 역량이 자립성을 상실하게 되면 그 시스템의 운영은 자본-국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만다는 것이 지난 20년의 역사적 교훈이다. 따라서 개혁의 시급성 때문에 호혜적 공동체의 구성을 통해 각자의 삶의 질, 자립적이고 자존적 삶을 새롭게 꾸려가는 일이 유예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지금 여기서 당장 자신의 생활세계의 현장에서" 비자본주의적이고 민주적-생태적인 방식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꼬뮨적 실천에 착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당장의 차별적-억압적 정치경제적 구조 및 법과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개혁의 득실표가 보여주듯이 각 하위 사회시스템의 지속적 개혁이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개혁은 그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고, 결국 자립적이고 호혜적인 생태적 삶의 영위라는 새로운 진보를 사회시스템 전반으로 확장하는 수단에 다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즉 개혁과 진보가 양자택일이 아니라 개혁이란 진보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고, 개혁이라는 수단이 부족하고 성과가 없다 해도 당장 이 자리에서 진보적 실천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87년 민주화 체제에서 사회운동이 안고 있던 문제는 현재 삶의 진보적 혁신을 뒤로 미루고 부분적 개혁만을 앞세웠다는 데서 발생했다는 얘기가 된다. 다중의 삶의 진보적 혁신 없이는 <재벌-관료 연합>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력이 실질적으로 형성될 수 없고, 그럴 경우 개혁은 실패로 끝난다는 교훈이 그것이다. 더 넓은 아파트와 과외비를 위해 더 많은 잔업을 불사하며 그 때문에 비정규직과의 일자리 나누기를 회피해온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중심의 노조운동의 귀결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따라서 개혁이라는 수단에만 의존하지 않은 채 지금 여기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혁신을 실천하는 일과 이런 진보적 삶의 혁신을 사회전반에 확대하기 위한 개혁적 실천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목표와 수단의 관계라는 점을 명확히 하자. 만일 지금 여기서 각자가 상품의존적인 자본주의적인 삶을 비자본주의적이고 자립적인 삶으로 변화시켜나가며, 이를 통해 삶의 양이 줄어들어도 오히려 삶의 질이 높아지는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 이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실천하려면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합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각 개인들의 일상생활을 비자본주의적으로 혁신하기에는 대다수가 자립과 자존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노동-농민-환경-보건의료-교육-여성-문화운동이 서로 협력하여 각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비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되는 호혜적인 프로그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부분적 노력들이 결합하여 한 시민단체든 지역 단위의 개인들의 모임이든 하나의 생태문화적인 생활문화공동체 형성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필요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지역단위로 지원할 수 있는 연결망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현재 분과학문처럼 개별화되어 있는 각 사회운동이 하나의 작은 공동체별로 통합적으로 연결될 수가 있다. 사회운동 간의 선순환구조를 만드는 실험들이 바로 이와 같은 소규모의 지역공동체들을 통해서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한편 이런 실험들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환경운동, 교육운동, 여성운동, 문화운동, 지역운동 등 각 단위 영역운동의 새로운 활성화, 각 영역의 정책과 제도 개혁의 실효성도 높여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경제주의적으로 위계화된 사회정책 시스템은 물론 역시 경제주의적으로 위계화되어 왔던 사회운동 영역들 간의 관계가 환원주의적 또는 병렬적 관계에서 벗어나 탈중심화된 역동적 연계가 맺어지는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이는 아직 하나의 실험적 제안에 불과하지만 이런 실험에서 진보와 개혁의 이중 절합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진보의 전망을 결여한 개혁이거나 이미 실패한 낡은 진보의 반복이라는 지리한 진자운동은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에 실망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우경화 또는 새로운 파시즘으로 이끌 위험이 크다. 진보적 전망 상실이라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는 새로운 진보를 지금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새롭게 창조해나가야 한다.

4. 자본에 대항하며-자본을 넘어서는 이중운동의 메카니즘

그런데 비자본주의적인 생산-협동조합을 지금 이 자리에서 만들어가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해서 기왕에 자본의 흐름을 투명하게 하고 국가를 민주화하는 개혁투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장 자립적 꼬뮨을 이 자리에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일정량의 공간-생계수단-활동비-사업비 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투자할 만한 여유자본이 있어야 한다.

또 사상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인권의 지속적 확대를 위한 민주주의 투쟁도 필요하다. 또 초기 조건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단시간에 급속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일정 규모에서 자립적 지속가능성이 확보될 때까지 상당기간 동안 공동체 자체는 자본주의적 상품과 화폐 유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성원들 대다수는 그동안 상품집약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생활의 상식과 기술, 지적-감성적-인성적-신체적 성향에서 반생태적이고 물신주의적인 ‘아비투스’에 물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로섬 게임의 LETS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성원들의 자발적 헌신과 희생과 호혜적인 아비투스가 장착되어야 하나 이 역시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또 초기에는 의욕을 갖고 참여해도 중간에 많은 탈락자가 발생할 수 있고, 갈등이 높아질 소지도 있다. 이런 이유로 꼬뮨적 실천의 지속가능성 및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의 확대 가능성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현실주의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1) 일정한 규모로 지속가능성이 확보될 때까지 꼬뮨의 재정은 상당부분 자본주의적 상품과 화폐,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와 법제가 허용하는 범위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꼬뮨의 지속가능성과 확대가능성은 여러 꼬뮨들이 일정한 재원과 프로그램을 시민사회의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수급받을 수 있게끔 사회적 공공성을 확대하는 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가장치의 민주화와 경제민주화를 통한 분배적 정의 실현과 사회적 공공성 확대는 이런 점에서 꼬뮨적 실천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꼬뮨적 실천이 가능한 필요조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개혁은 비자본주의적 실천을 위한 수단을 제공해줄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의 의미가 단순히 필요조건의 충족이라는 소극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자본과 국가의 흐름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민중적 개혁투쟁이 약화된다면 오늘날과 같이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전횡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자본-국가의 힘이 강해지면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착취도 강해진다. 강력한 견제수단이 사라진 포스트냉전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전횡을 이루게 된 것이나 IMF 위기 이후 한국사회에서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도 실은 이 때문이다.

2) 하지만 앞서 살폈듯이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개혁투쟁은 그 자체로 상당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경제주의로 제한된 노동조합운동은 서구에서 확인되었듯이 노동귀족화되기 쉽고,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서 노동운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시민운동 역시 영역별로 나뉘어져 분열될수록 자본과 국가가 마련한 제도적 틀 내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의 시민운동 역시 이런 문제점에 직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개혁투쟁의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개혁투쟁은 꼬뮨적 실천에 필요한 재원과 공간을 열어줄 수 있는 투쟁의 수단이고, 개혁투쟁은 꼬뮨적 실천으로 자립성과 자율성을 키운 다수의 시민들로부터 힘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칸트의 표현을 빌자면 꼬뮨적 실천 없는 개혁투쟁은 맹목적이고 개혁투쟁 없는 꼬뮨적 실천은 공허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제 하에서 자본주의 내에서 경제투쟁이자 분배정의 실현을 위한 개혁투쟁과 자본주의 내에서 틈을 만들어내어 비자본주의적인 꼬뮨적 실천을 확대해나가는 투쟁이 지닌 관계를 다음과 같은 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볼 수 있겠다.



A: 자본주의 a: 개혁투쟁과 꼬뮨적 실천의 연결 개시점
B: 개혁투쟁 b: 자본주의적 생산-소비와 비자본주의적 생산-소비의 균형점
C: 꼬뮨적 실천 c: 자본주의의 소멸지점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가 소멸한 지점에서도 개혁투쟁과 꼬뮨적 실천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약화되거나 연결이 끊어질 경우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는 쉽게 부활한다는 것이 바로 20세기 <역사적 공산주의>가 보여주었던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개혁투쟁과 꼬뮨적 실천의 지속적이고 유기적 선순환 연결망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운동의 성패를 가늠하는 실질적인 관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적 개혁투쟁과 꼬뮨적 실천은 어떤 방식으로 지속적인 선순환 연결망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그레마스의 의미시각형을 이용하여 다양한 사회운동을 다음과 같은 좌표에 위치시켜 상호관계를 맺게 하는 다이어그램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생태)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축은 맨 위의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축과 수직적으로 대응하는 가장 아래에 위치한 여성/청소년/노인/소수자와 자연생태의 축이다. 위쪽은 반생태적이고 몰적(molar)으로 구조화되는 방향이라면 아래쪽은 생태적이고 분자적(molecular)인 방향이다. 한편 가운데 사각형의 두 수직축과 두 수평축은 각기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축, 사회중추 시스템-생활세계의 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위-아래의 두 수평축 사이를 가로지르는 문화-보건의료의 축과 좌우의 두 수직축 사이를 가로지르는 반생태적 자본-반자본적 생태의 대립축이다. 이런 대립축들은 강력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두 축이 만나는 가운데 지점에서 <다중적 꼬뮨적 실천>(rhizome-fractal communal practice)이 위치하고 있다.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축은 생산-재생산, 사회시스템-생활세계, 보건의료-문화의 모든 단위들을 분리시키고, 대립하게 만든다. 반면 <다중적 꼬뮨적 실천>은 이 모든 요인들이 상호순환하게 만드는 선순환연결망의, 탈중심화된 중심이라는 역설적인 장이다.

5. 비자본주의적 생산-협동조합의 생태문화적 성격에 대하여

고진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임금노동을 거부하는 <아우토노미아 운동>과 자본주의적 상품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자존적 공동체를 꾸리려는 <간디의 운동>을 결합한, 비자본주의적 생산-협동조합이란 곧 맑스와 프루동을 결합한 것과도 같은 것이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고진의 이런 시도를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을 새롭게 종합함과 동시에 맑스와 칸트를 새롭게 연결시킨 지극히 야심적인 이론적 대작"이라고 평했다. (2)

그러나 고진이 90년대 10년간에 걸쳐 이루어낸 이런 연구에도 흡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 노동자운동과 소비자운동을 결합한 비자본주의적 생산-협동조합의 성격이 경제와 윤리의 결합에 한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꼬뮨이 도덕경제에 한정된 성격을 지닌다면 현실적으로는 작은 단위는 몰라도 보다 큰 단위로의 지속적 확대가 어려울 것이다. 미적-문화적 만족을 동반하지 않는 윤리적 자기 규제란 강제적이고 폭력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일시적으로 자본주의적 상품을 소비하지 않고 자족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단지 경제와 윤리의 결합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주변에 넘치는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매력적인 유혹들을 떨쳐버리기에는 오늘 우리의 삶 자체가 너무나 상품의존적인 상태로 변질되어 있기 때문이다.

린턴이 1982년 제창한 LETS 시스템은 오늘날 인터넷과 용량이 높은 PC의 보급에 의해 운용이 훨씬 용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삶 전체의 상품의존도가 더욱 높아졌기에 자발적인 상품소비거부의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진은 "꼬뮤니즘은 경제적인 것만도 도덕적인 것만도 아니다. 칸트의 말을 비틀어 말하자면 경제적 기반을 갖지 않은 꼬뮤니즘은 공소하고, 도덕적 기반을 갖지 않은 꼬뮤니즘은 맹목적"(3)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비자본주의적 생산-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부의 틈 사이에서 작동해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경쟁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 소비문화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새로운 미적문화, 자본주의 상품미학에 의존하지 않고도 더 풍부한 미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문화가 내부에 장착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도덕경제가 지속가능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나는 꼬뮨적 실천은 경제적이자 도덕적인 것만이 아니라 미적-문화적(생태문화적)이어야만 현실적으로 지속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마치 칸트의 비판철학이 『순수이성비판』(제1비판)(1781)과 『실천이성비판』(제2비판)(1787)이라는 두 비판서 만이 아니라 『판단력비판』(제3비판)(1790)에 이르러야 비로소 완결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물론 이는 『판단력 비판』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판단력 비판』을 제외할 경우 두 비판이 현실의 복잡한 작동을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고진 역시 칸트의 제1비판(과학, 자연법칙)과 제2비판(도덕, 자유)에서 드러난 한계를 제3비판(예술, 합목적성)에서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 셋이 '보로메오 고리'와 같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4)

하지만 고진은 이와 같은 인간인식의 과학적-도덕적-미적 삼각고리를 꼬뮨의 현실적 작동 가능성을 규명하는 데에는 응용하지 않은 것 같다.(고진이 2000년에 시작한 NAM 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고진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는지는 추후에 재론하고자 한다).

많은 철학적 쟁점이 있지만 내가 『판단력 비판』에서 각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칸트가 '취미판단'(예술)을 과학과 도덕을 매개하는 장소로 보았을 뿐만이 아니라 '숭고'에서 미와 선, 미학과 윤리학이 연결되는 매개 장소를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주체를 위협하는 거대한 타자(폭풍이나 태산)와 마주칠 때 일어나는, 고통의 경험을 동반한 숭고의 체험을 통해 우리의 감성과 이성은 협소한 차원에서 벗어나 광대한 차원으로 확장되는 변화, 이를테면 환골탈태의 변화를 겪는다.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와 마주치는 가운데서 공포를 느끼면서도 미적인 자기 확장을 통해 오히려 윤리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학적인 변화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게 되면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미적-윤리적 패러다임'에 다다를 수 있다.(5)

재화를 축적하거나 또는 물질적 생존만을 목적으로 임금노동에 삶의 기회와 시간을 모두 투자해야 하는 경제적인 삶은 맹목적인 삶이다. 또 금욕적 생태윤리를 강제하여 미적 문화활동을 억제하면서 무감동과 무의미한 상태에서 단순히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삶은 누구도 바라는 삶이 아니며 공허한 것이다. 미적인 것과 분리된 윤리적 삶이 아니라 미적-윤리적인 삶만이 타자 및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서도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풍부한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바람직한 사회는 생태적이고 미적인 문화활동이 삶의 중심 가치가 되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사회성원들의 미적-생태적 판단력과 감수성의 고양이 자연과 생명 존중의 근거가 되고, 이것이 곧 자연과 인간의 공생 윤리의 자발적(비강제적) 기초가 되는 사회가 그것이다. 이런 사회가 바로 비자본주의적인 꼬뮨적 실천이 지향하는 민주적 생태적 문화사회이다.

현실적으로 꼬뮨적 실천이 가능한 것은 다수의 대중들이 에너지와 자원의 절약을 자율적으로 감수하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역능과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는 길을 찾았을 때뿐이다. 삶의 양과 삶의 질을 함께 줄이는 것은 종교적 수행을 제외하고는 일상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물론 삶의 질은 일정한 물질적 조건 없이는 향상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생계유지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고 나면 삶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인은 생명 가치와 미적-윤리적 가치의 향유와 향상이다.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오히려 공기 좋고 날씨 좋은 자연 속에서 살아 있음을 만끽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공동의 일과 놀이를 즐기는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감성적, 지적, 윤리적 풍요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연/타자와의 공생 속에서 출현하는 생태적인 미적경험을 통해 지적-윤리적 역능을 향상할 때라야만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풍부한 공통감각을 상실하고 도구적 지식과 감각적 자극의 일차원으로 위축되어 버린(한국사회도 이제 마르쿠제가 1960년대에 말한 일차원적 사회가 되어버렸다) 오늘의 주체성을 재충전하기 위해서는 현대사회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내버렸던 전통적 경험들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미적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의 운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생명의 실재성이 야기하는 생동하는 힘을 생태적인 미적 경험에서 구체적으로 맛본다. 미적 경험 자체는 어떤 궁극적인 요소로 분석되고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칸트가 말했듯이 대상과 마주하는 감성, 욕구, 감정, 오성, 상상력, 반성적 판단력, 이성 등의 다양한 능력들이 전체적으로 절합되어 특정한 배치 형태를 이룰 때 나타나는 하나의 전일적(holistic) 경험이라는 점에서 생태학적이고 시스템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다. 특히 생태적인 미적 경험을 체험할 때는 인공적인 대상을 대할 때의 미적 경험과는 다르게 자연, 우주와의 전일적인 합체감이 더욱 강화된다.

꼬뮨적 실천의 지속가능성의 열쇠가 생태문화적인 경험의 공유와 소통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의 다이어그램에서 문화가 보건의료와 함께 노동-교육-환경-여가/오락 등의 네 축을 매개하는 가운데의 지점, 즉 다중적인 꼬뮨적 실천의 차원을 지시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꼬뮨적 실천이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과 소비자운동이 경제적-윤리적 매개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전체가 문화운동, 즉 비자본주의적인 생태문화운동에 의해 풍부하게 매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 나가며

근대화 과정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인간역능(오성과 시각과 말초적 욕망)만을 극대화하여 비판적 이성, 반성적 판단력, 상상력, 감수성, 신체적 공통감각 등을 극도로 억압하고 소멸시켜 왔다. 맑스가 비판했던 ‘소외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노동자 개인이 생산수단과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 개개인이 인간의 유적 능력 전체의 잠재력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정말 아이러니컬한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인류 전체가 이루어내는 과학기술의 역량은 점증하고 있는데, 개개인의 역능은 유적 능력의 가능한 잠재력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자립과 자존의 역량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지구화는 지구환경과 다중에게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생태적 자립과 자존 능력의 마지막 한 방울조차 상품화하여 고갈시키고자 위협하고 있다. 한미FTA는 이러한 위협을 한반도에서 실현하려는 한국과 미국의 자본-관료 연합의 공식적인 동맹이다.

단순히 국가와 자본을 부정하는 태도만으로도, 고립된 소수자 공동체를 영위하는 것만으로도, 또는 한미FTA 협정 체결반대를 위한 담론투쟁과 시위투쟁만으로도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파도에 대응하기 어렵다. 노동운동-농민운동-민중운동-시민운동-지식인운동-공동체운동 등 자본-관료연합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이 새롭게 연대하여 한편으로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드는 것을 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립과 자존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새로운 실험을 실천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싸움은 지난 20여년에 걸친 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싸움과는 규모와 성격이 판이할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이는 과거와는 달리 기동전이 아니라 장기적인 진지전(또는 지하전)의 성격을 지닐 것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1905년 고종황제와 일부 친일 관료들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막강한 군사적 압력과 한일경제합방이 가져올 사탕발림에 눈이 멀어 한반도의 미래를 팔아먹고 만 '을사늑약'을 체결한 바 있다. 정확히 100년이 지난 오늘 노무현 정부와 일부 친미관료들의 밀약에 의해 한미경제합방이라는 과거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지난 세기 천추의 한이 되었던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새로운 실천에 임해야 할 때이다.




(1) 김도훈 외 지음,『시스템 다이나믹스』(대영문화사, 1999)

(2) 가라타니 고진, 같은 책, 512쪽.

(3) 같은 책, 222쪽.

(4) 같은 책, 74~75쪽.

(5) 심광현 지음,『프랙탈』(현실문화연구, 2005),「4장 문화생태학」와「5장 주체성의 새 지도」참조.
덧붙이는 말

심광현 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이며, 이 글은 문화과학 45호에 실릴 예정이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